[문예마당] 양은 주전자
얘야, 막걸리 좀 받아 오렴 엄만 맨날 나만 시켜, 언니는 안 시키고 떼구르르 주전자 뚜껑 저거 성질머리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 양은 주전자 몸통으로 뽀얀 막걸리가 컬컬컬컬 목까지 차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이장님댁 경숙이네 마당엔 백열등이 환하고 나무 타는 연기가 숭숭 구멍을 내며 마을로 퍼져간다 심부름은 나만 시켜 몇 발짝 걷다가 돌멩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 발가락이야 벌컥벌컥 막걸리가 춤을 추다 뽀그르르 거품을 토해냈다 멀미가 가신 노란 주둥이 속 뽀얀 혀가 내밀내밀 까불지 마, 주둥이를 콱 틀어막았다 두터운 내 입술로 쏴아아 목젖으로 퍼지며 낭떠러지로 처박히는 이 아찔한 숨 막힘 내 인생의 막걸리 첫 모금 우리 언니는 공부만 지키지 삼대독자 내 동생은 몸집만 지키지 나는, 심부름이 날 지켜주냐 아, 인생은 무엇이고 운명이란 무엇이냐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 술 한잔하시는 날 예끼 이놈! 할아부지이, 하나도 안 무섭다 기분이 아쭈 좋아, 엄마도 이쁘고 언니도 이이쁘다 심부름은 내가 지킨다 언제 또 제사가 돌아오나 홍유리 / 시인문예마당 주전자 양은 양은 주전자 주전자 뚜껑 할아버지 제삿날